친구들…….
플로리다에 머물 때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있다.
‘카룰로스’는 라틴계 미국인으로 현재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대학시절 프로비던스 禪선 센터에서 숭산스님께 참선을 배우면서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는 아침종성, 예불, 반야심경, 관음기도까지 척척 외우는 것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거기다 토요일마다 보현사 법당에서 미국인들의 참선수행과 다도 모임을 지도 한다.
웬걸, 스님도 하기 힘든 참선수행을 한다며 눈 푸른 미국인들이 끙끙대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가소롭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말을 건넸다.
‘카룰로스 참선은 쉽지 않다. 거기다 깨달음을 얻기란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니?’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룰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니다. 정말 쉽다. 너가 어렵다. 나는 쉽다’ 명쾌했다.
‘레이’라는 백인 친구는 토요일 참선모임부터 일요일 한인법회까지 꼬박 참석하는 독실한 불자다. 당연히 한국말은 까막눈이다. 한국어로 하는 법문은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염불소리는 에너지가 좋아 명상을 하면 행복하다고 웃는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레이는 중년이 되어서도 욕망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교서적들을 보다가 불교의 참선수행을 접하고 병아리가 알을 깨듯이 탁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지금은 참선수행이 삶의 에너지라며 시간 날 때 마다 좌복에 앉아 수행을 한다.
‘브래챌’은 불교법사이면서 합기도를 가르치는 관장이었다. 미국인들은 무도에 대해서 관심이 꽤 많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나이가 꽤 많았는데도 인기가 좋았고 동료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방석을 굉장히 높게 해서 살짝 무릎만 굽힌다거나, 이도저도 안되면 의자에 앉아서 참선을 한다. 앉아 있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 수행을 하기 위해서 앉기 때문에 의자에 앉든 좌복에 앉든 화두만 성성하면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브래챌은 멋지게 가부좌를 할 줄 알았다.
‘수미’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1세대이다. 가족들이 일본식 수행 공동체에서 살면서 불교 교리와 명상을 했고 자연스럽게 신학대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30대 젊은이들 중에서 미국에서 활발하게 불교운동을 하는 친구이다. 이 친구에게 들은 인상 깊은 내용이 있다. 평상시 난 한국불교는 그 수행력을 사회적으로 환원 시키는 것이 너무 미흡하다고 생각을 했다.
달라이라마나 팃나한 처럼 불교의 수행력을 평화운동이나 인권운동 같은 사회적인 실천으로 증명을 하는 것이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을 했다. 내 생각을 들은 그 친구는 잠시 사색을 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그러니까 스님 말은 한국불교계가 사회복지나 인권, 평화운동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는 나의 말에 그 친구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스님이 말하는 사회복지나, 인권, 평화운동은 2000년 서구의 기독교 사회에서 중요시 여기며 실천해 왔던 덕목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서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동양의 불교에서 해답을 찾고 연구를 하는 것인데 한국불교계로서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그런 것 보다는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오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수행풍토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더 매력적일 것 같은데요’ 한국 불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