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는 타닌을 비롯해 인체에 이로운 성분을 다량 함유한 식품
불가에서는 차(茶)를 만들어서 마시는 과정 자체를 ‘명선(茗禪)’이라 일컬을 만큼 수행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 시대에는 전국 각지에 ‘다방(茶房)’이 있을 정도로 차(茶)가 유행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잠시 주춤했으나 중기부터 다시 차(茶)가 성행했다. 조선 말기 이후 차는 건강과 심신 수련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강진 지역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무위사와 월남사지가 있는 월출산 일대를 중심으로 차가 재배되었다. 최근 월남사지 지표 발굴조사에서 ‘차맷돌’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 차문화의 오랜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또한 백련결사 당시에도 차(茶)는 스님들이 애호하는 수행의 방편이었으며 결사에 참여했던 정명국사 천인, 진정국사 천책, 무외국사 목암은 차에 관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차문화 부흥에 큰 기여를 한 백련사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던 시절(1801~1818), 대흥사 강백을 지냈던 아암 혜장선사(兒巖 惠藏禪師)는 나이와 종교를 초월해 다산과 자주 만났다. 백련사 뒤 만덕산은 야생차가 많아 이를 ‘다산(茶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정약용의 호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만큼 정약용과 혜장선사는 차를 매개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조선 차문화의 중흥조로 알려진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草衣禪師)는 혜장선사의 소개로 정약용을 만나 차의 기능, 유래, 효능, 제작법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이를 발전시켰으며 정약용은 초의선사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주길 청한 ‘걸명소(乞茗訴)’를 남기기도 했다. 훗날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귀양을 왔을 때 그와 교유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차를 매개로 한 것이었다.
백련사에 깃든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은 혜암 스님 문하로 다솔사 효당 최범술 스님에게 차를 배운 효서 여연(曉誓 如然) 스님이 차 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노력 중이다.